2014년 기후변화연구 공동학술대회 기조강연 (6/19 세종대학교 광개토관)

<기후과학, 기후 카지노, 기후변화의 정치>
이승훈 녹색성장위원장

1. 자연 질서를 파괴한 인간의 무책임성

 그 동안 인간이 과다하게 배출한 온실가스가 대기에 누적된 결과 지구온난화를 불러왔다는 설명은 이제 널리 알려진 과학적 지식이다. 그대로 방치할 경우 그 결과가 대단히 파국적일 것이라는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파국을 막기 위해서 온실가스배출을 줄이자는 논의에 들어가면 모두 서로 눈치만 살피면서 남들이 먼저 하기만 바란다.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을 2020년도 평상시 대비 30% 줄이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약속에 대해서도 국내에서는 하지 않아도 될 약속을 공연히 했다는 의견이 많다.
 여야가 합의하여 배출권거래제에 대한 법률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이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그 때는 잠잠하던 산업계가 정작 그 시행 시기가 내년으로 닥아 오자 배출권 거래제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표출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시큰둥한 일에 우리만 유독 유별나게 앞서나가려 한다고 못마땅해 한다. 최근 거센 저항을 만난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도 마찬가지다.
 시야를  국제무대로 옮겨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지구온난화는 인류 전체의 운명이 걸린 문제다. 더욱이 인류 역사상 경험한 적이 없는 최대의 시장실패 사례다. 내가 온실가스를 좀 많이 배출하더라도 다른 이들이 그들의 배출량을 그만큼 더 감축해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각자 이런 마음자세로 나가면 온실가스 배출 감축은 불가능하므로 모든 나라가 공조하는 대응체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모든 나라가 감축의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선진국들과 지금까지의 온난화를 책임져야 하는 선진국들이 더 많은 감축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는 개도국들의 의견이 팽팽히 맞선다. 이 의견 대립이 실제로 나타난 작년 바르샤바 당사국 회의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가장 많이 배출하는 중국과 미국은 각각 그들의 국내 사정에 발목이 잡힌 상태고 다른 나라들은 이래저래 눈치만 살피는 중이다. 모든 당사국이 각각 감축목표를 자체적으로 결정하고 내년 21차 당사국 총회에서 최종 결정하기로 한 2020년 이후 국제기후변화 대응의 신기후체제가 어떠한 모습으로 결정될 것인지는 아직도 그 윤곽이 분명치 않다.
 현 시점에서 온실가스 배출 감축은 인류 사회가 반드시 수행해야할 시대적 과제다. 전문가들은 기온상승을 20C 이내로 통제할 기회를 이미 잃었다고 조바심친다. 온실가스 누적량이 임계치를 넘으면 온난화가 스스로 증폭하기 시작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때 늦게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더라도 온난화를 통제할 수가 없다고 한다. 시기를 놓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는 사태를 맞을 수도 있다. 온실가스 배출 감축의 필요성이 이처럼 절박한데도 나보다 남들이 먼저 하기만 바라면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점에서는 개인이나 국가나 다를 바 없다. 인류의 종말을 부를지도 모르는 대재난을 두고 이렇게 눈치 보느라 대응 조치를 미루는 까닭은 각자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2. 인간 탐욕이 부르는 자연의 징벌


 최근 나온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노아의 방주’에서 인간은 탐욕의 포로가 되어서 조물주가 창조한 다른 생물들을 무절제하게 포획한다. 노아는 추악한 탐욕 때문에 자연의 균형을 파괴하여 창조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인간을 혐오한다. 영화 속의 노아는 모든 생명체가 신이 창조한 질서 속에서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는 아름다운 낙원을 되살리려면 인류와 같은 탐욕의 피조물은 소멸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결국 노아는 모든 피조물은 보존하되 인류는 멸종시키는 것이 분노한 신의 뜻이라고 받아드리고 태어난 쌍둥이 손녀의 처리를 놓고 고뇌한다. 인류도 다른 동물과 같은 창조주의 피조물인데 무엇이 인류로 하여금 창조주가 부여한 질서를 거부하고 다른 피조물들을 멸종시키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 극악한 피조물로 몰아갔을까? 기독교의 성서는 금단의 선악과를 따먹고 선택의 지혜를 얻은 행위를 원죄로 규정한다.
 그 지혜는 인간에게 많은 능력과 고뇌를 주었다. 특히 저장의 능력을 터득한 인간은 저장을 모르는 다른 동물에 비하여 월등하게 탐욕스런 존재로 바뀌어 갔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포악한 사자조차도 자신이 먹을 만큼만 사냥한다. 저장의 지혜를 모르는 야수에게 자연은 그 자체가 거대한 창고다. 배를 채운 사자는 불필요한 사냥에 체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 현재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차지하려한다.
 저장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각자가 저장한 물자는 각자의 소유라고 하는 사적 소유의 개념이 제도화하였다. 그 결과 그 동안 거대한 창고로 기능해 온 대자연의 성격은 사적 소유물이 아닌 공유자산으로 귀결되었다.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내가 지금 사냥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사냥해 갈 것이므로 인간은 서로 경쟁적으로 사냥하는 것이다. 결국 대자연의 창고가 인간의 탐욕 때문에 피폐해지고 마는 ‘공유지의 비극 (Tragedy of Commons)’이 발생한다. 인간의 탐욕은 작게는 도둑질, 강탈, 사기로부터 크게는 살인, 더 나아가서는 전쟁도 불사하여 결국 창조주로 하여금 말살의 징벌을 결심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지난 해 1월에 평생 하고 싶었던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을 다녀왔다. 이른 아침 초원에서 많은 가젤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들이 모두 풀뜯기를 중단하고 일제히 어느 한쪽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하이에나 3마리가 나타난 것이다. 나는 드디어 하이에나의 가젤 사냥이 시작되는 줄 알고 긴장하였다. 드디어 하이에나들이 질주하기 시작하였고 살아남으려는 가젤들은 일제히 전속력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하이에나들은 가젤을 쫓는 것이 아니었다. 하이에나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초원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 다음날은 암사자 한 마리를 목도하였다. 암사자는 멀리에서 다가오는 가젤 떼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가젤들이 접근해 오는데 암사자는 모습을 숨겼다. 첫 번째 가젤이 지나면서 드디어 야생의 사냥을 기대한 관광객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모든 가젤들이 무사히 지날 때까지 암사자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제의 하이에나나 오늘의 암사자나 모두 이미 그날의 배를 채웠기 때문에 더 이상 사냥하지 않았다는 것이 안내인의 설명이었다.
 그날 오후에는 사냥한 새끼 코끼리를 먹고 있는 숫사자를 만났다. 자기 등치만한 새끼 코끼리를 한 번에 다 먹을 수 없어서 숫사자는 먹다가 쉬고 있었다. 그러자 작은 재콜 한 마리가 나타났다. 슬금슬금 다가와서 야금야금 훔쳐 먹기 시작하였다. 숫사자가 일어나서 으르렁거리면 잠시 피했다가 다시 와서 조금씩 챙기는 모습이 제법 구경거리였다. 우리 사파리차 뒤쪽에는 하이에나 두 마리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안내인 설명에 따르면 숫사자가 충분히 먹고 떠나면 남은 몫을 차지하려 기다린다는 것이다.
 재콜이나 하이에나의 이러한 행태를 보면 정글의 야수도 힘든 일 싫어하는 점에서는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전날의 하이에나나 암사자는 탐욕스럽지 않아서 불필요한 살생을 않은 것이 아니라 배가 이미 부른 터에 먹지도 못할 사냥감을 잡으려 힘쓸 이유가 없기에 그냥 넘긴 것이다. 인간은 당장 먹을 수 없으면 저장해 두었다가 나중에 먹을 줄 안다는 점에서 일반 짐승과 다르다. 먹지도 못할 사냥감을 탐욕스럽게 쫓는 까닭은 저장했다가 다음에 먹을 능력과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류의 탐욕은 자연의 조화를 깨뜨렸고 이번의 영화는 결국 노아의 창조주로 하여금 인류 절멸의 징벌을 결심하도록 만들었다고 설정하였다.
 저장 능력을 끝없이 발전시켜나간 지혜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탐욕의 원천으로서 조물주가 부여한 자연 질서를 위협한다. 이제 자연 질서에 대한 인류의 두 번째 위협이 온실가스배출에 의한 지구온난화다. 대기가 더워지고 기상이 변하는 것은 섭리의 몫이지 결코 인간의 몫이 아니었다. 그런데 인간의 행동이 섭리의 배려를 교란하는 사태가 현실화되기에 이르렀다. 이 교란을 절제하지 않으면 인류는 또 다시 노아의 대홍수와 같은 창조주의 징벌을 겪어야 할 것이다.


3. 탐욕을 절제해야 온난화의 재앙을 막는다.


 기왕 인간 능력이 기후까지도 변경시킬 수준에 이르렀다면 바로 그 능력을 이용하여 기후의 파괴적인 폭력을 우호적 속성으로 바꾸는 것이 옳다. 우리는 이제 인류의 온실가스 배출이 지구온도를 올릴 수도 있고 내릴 수도 있다는 지혜를 터득하였다. 현 단계에서 인류가 공동으로 노력하면 온실가스 배출을 크게 감축할 수 있고 그 결과로 지국 온난화를 통제할 수 있다.
 온실가스 배출의 감축은 결국 인간 탐욕의 절제를 요구한다. 파국적 결과를 뻔히 내다보면서도 사람마다 감축의 고통을 남들에게 떠넘기려고 과학적 사실을 부정하고 음모론을 퍼뜨린다. 창조주가 보기에 오늘날 인류의 이러한 행태가 그 옛날 도덕적으로 크게 타락하였다는 노아 시대의 인류와 얼마나 다를까? 창조주의 징벌이 점점 가시화되고 있는 지금 녹색성장이야말로 현대의 방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아 당대의 인간들이 산꼭대기에 방주를 만들고 있는 노아를 비웃었듯 현대인들도 녹색성장을 가벼이 생각한다.
 기후과학자들에게 온실가스 효과와 지구온난화는 의심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온난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온난화로 열대지방이 피폐하더라도 그만큼의 한대지방이 따뜻해지면 득이 실을 상쇄한다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피폐한 지역의 인구가 살기 좋아진 지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일어날 국제분쟁이 얼마나 심각할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 같다. 온난화는 해양과 대기를 자극하여 기후 패턴을 바꾸는데 그 과정이 극심한 기상이변을 초래하기 때문에 매우 파괴적이라는 설명을 곁들여야 겨우 귀를 기울인다. 산업혁명 이후 지표의 평균온도가 섭씨 0.8- 0.9도 상승하는데 그쳤지만 이미 가공할 파괴력의 혹한이나 태풍 하이엔과 같은 기상이변을 여러 차례 불러왔다.
 지구 온난화가 지금의 페이스대로 진행된다면 세계의 여러 지역은 머지않아 미증유의 기상재난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진 나라의 인구는 다른 지역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느 나라나 초대형 난민의 수용을 반길 리 없으므로 인류는 결국 또 하나의 세계대전에 휘말릴 위험을 당면할 것이다. 단기와 중기적으로는 기상이변의 재앙에 대비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파국적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 앞으로 전개될 지구온난화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라면 우리의 대책은 그에 순응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구온난화의 상당부분이 인간의 온실가스 배출 때문이라면 배출감축은 오늘날 인류가 모든 것에 우선하여 추진해야 할 지상 과제가 되어야 한다.


4. 기후카지노와 기후변화 정치


 기상재난이 모든 나라를 덮치지는 않았지만 당한 나라의 피해 규모는 천문학적이다. 경제학자 노르드하우스는 전 세계 각국이 언제 기상이변의 재난을 당할지 모르는 기후 카지노에 들어섰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대로 가면 카지노 수준을 넘어서서 결국 모든 나라가 파국으로 내몰리도록 악화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노르드하우스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되기 전에 모든 나라들이 이 불길한 카지노를 나설 수가 있는데 그 방법은 세계 각국이 온실가스 배출 감축에 적극 동참하는 것뿐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온실가스 감축은 막대한 비용을 수반한다. 기후변화를 둘러싼 현실의 국제정치는 이 비용의 국별 분담을 둘러싸고 밀고 당기는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나라마다 서로 비용을 덜 부담하려고 부산하게 움직일 때 국제 협상은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전개될까? 모든 나라가 동의하려면 나름대로 원칙이 분명하고 설득력을 발휘하는 안이라야 한다. 우선 현재의 국별 배출량을 실제 배출량으로 인정한 다음 각국이 연차적으로 동일한 비율로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해 나가는 동등감축의 원칙을 고려해볼 만하다. 이 원칙은 현재의 생산활동에 끼칠 교란 요인을 최소화하면서 국별 감축의무를 현재 배출량의 일정 비율로 부과한다. 그러나 이 동등감축의 원칙은 국별 배출권을 현재의 수준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 동안 지구온난화를 유발한 나라들로 하여금 여전히 더 많은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도록 우대한다. 지금까지의 지구온난화에 책임이 있는 선진국들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으므로 개도국들이 반발할 만한 원칙이다.
 탄산가스 배출이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기본권이라면 모든 개인은 이 기본권을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 배출권을 평등하게 할당하려면 매년 허용되는 총배출량을 세계 전체의 인구로 나눈 것을 각 개인에게 허용된 배출량으로 인정하는 동등배출의 원칙을 수용해야 한다. 이 동등배출의 원칙을 채택하면 국별 배출 할당량은 인구에 비례하는 크기로 결정된다. 현재 1인당 실제 배출이 1인당 배출 할당량보다 더 많은 온난화 유발국들은 배출을 적게 하는 나라로부터 배출권을 구입해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배출을 많이 하는 선진국들이 적게 하는 개도국들로부터 배출권을 사들여야 할 것이다.
 현재 세계 각국은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는 녹색기술의 개발에 노력하고 있는데 개발에 성공하는 기업들은 대체로 기술적으로 앞선 선진국 기업들이다. 온실가스 배출 감축에 참여하려는 개도국들로서는 선진 녹색기술을 도입할 수밖에 없는데 그 사용료가 만만치 않다. 동등배출의 원칙을 채택하되 저배출 개도국들로 하여금 선진국의 배출 감축 기술을 구입하는 대금지불에만 배출권 판매수입을 사용하도록 제한한다면 매우 효과적인 감축방안이 될 것이다. 다만 동등배출의 원칙은 현재의 생산활동을 상당히 교란할 것이므로 단기적으로는 부작용이 클 것이다.
 기후변화의 국제정치는 결국 매년 국별 배출량과 감축량에 대한 협상을 그 내용으로 한다. 당장은 동등감축으로 시작하여 현재의 생산체제에 대한 교란요인을 최소화하자는 안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모든 개인에게 동등한 배출량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부정하기 어렵다. 결국 동등배출의 원칙을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국가별 이해관계와 명분이 서로 팽팽한 만큼 그에 대한 합의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지만 밀고 당기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수만은 없다. 처음에는 동등감축으로 시작하지만 연차적으로 동등배출의 원칙으로 이행하는 방식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온실가스 배출 감소의 원칙이 어떻게 결정되든 일단 국제 감축체제가 확정되면 그 시행은 전례 없는 강제력을 발동할 것이다. 의무 이행의 실패 정도에 따라서 벌과금, 관세보복, 그리고 무역배제에 이르기까지 위반국이 감당하기 어려운 각종 국제제재가 뒤따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처지는 어떻게 될까?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독일과 일본을 훨씬 더 앞지르는 가운데 온실가스 배출실적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던 만큼 우리의 고통은 그만큼 더 클 것이다.
 당장 2020년 온실가스배출 목표인 평상시 대비 30% 감축을 달성한다면 그로 인해 우리의 GDP는 0.502%포인트만큼 감소할 것으로 예측된다. 협상을 남겨둔 신기후체제는 2020년 이후를 겨냥하므로 우리는 추가의 경제적 부담을 각오해야 한다. 온실가스의 주종인 탄산가스는 결국 화석에너지 소비로부터 발생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근본적 대책은 지속가능한 에너지체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화석에너지를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하는
사업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 되었다.


5. 코앞에 닥친 녹색에너지 시대

 지열과 태양열을 제외한 재생에너지의 대부분은 전력을 발전하는 1차에너지로 활용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생에너지의 사용폭을 늘리려면 발전연료로 쓰는 석탄 등 화석에너지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재생에너지 발전은 정작 전력이 필요할 때 발전하지 못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 태양광발전은 밤에는 불가능하고 풍력발전은 바람이 불 때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태양광과 풍력 발전을 확대하려면 발전불가능한 시간대의 전력수요 충족을 감당할 back-up 발전설비를 함께 갖추어야 한다. 재생에너지 발전은 그만큼 더 많은 비용을 소요한다는 말이다. 유럽처럼 전력계통이 국제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별도의 back-up 발전설비를 갖추지 않더라도 프랑스나 스웨덴의 원전이 발전하는 전력을 가져다 쓸 수 있다. 덴마크가 2020년 풍력발전 비중을 4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전력계통 면에서는 고립무원의 섬나라와 다름없다. 대륙과의 연결은 북한이 차단하고 있고 일본과 해저 케이블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처지에 덴마크와 비슷한 야심찬 계획을 감당할 수 없다.
 우리나라가 재생에너지 발전을 확대하려면 전력을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빼 쓰는 전력저장장치 (energy storage system, ESS) 의 신에너지를 대폭 활용해야 한다. 전기자동차가 대량 보급되는 시대가 되면 스마트그리드를 이용하여 주차중인 전기자동차들을 집합적 ESS로 이용할 수 있다. 우리의 밧데리 기술이 세계를 선도하는 만큼 전기자동차 기반의 ESS 사업은 매우 유망한 부문이다. 최근에 개발된 태양열 소금용융방식의 ESS라고 할 수 있는 집중태양발전 (concentrated solar power, CSP) 도 관심 가져 볼만하다. 태양열로 녹인 소금은 밤새도록 증기터빈 발전기를 가동할 수 있을 만큼 열보존 능력이 탁월하다고 한다. 최근 영국의 민자발전사는 튜니시아에 2GW규모의 CSP 발전소를 건설하고 지상 해저 HVDC 케이블로 이태리와 연결하는 TuNur 사업을 진행 중이다. 발전량의 10%를 튜니시아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나머지 90%의 전력을 유럽에 공급하는 사업이 정부 보조금이 없는 가운데도 수익성이 높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국제에너지기구 (International Energy Agency, IEA)가 발간한 ‘2014년 에너지 기술 전망 (Energy Technologty Perspective 2014)’에 따르면 지금 ‘녹색에너지기술에 매 1달러의 투자를 추가할 때마다 2050년까지 3달러어치의 연료를 절감한다 (Every additional dollar invested can generate three dollars in future fuel savings by 2050)’고 한다. 제도를 정비하고 불확실성을 제거하면 녹색에너지기술에 대한 투자가 수익을 실현할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녹색에너지가 화석연료보다 결코 더 불리할 리 없는 시대로 진입하는 터에 화석연료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을 짓이다. 
 녹색에너지 기술은 비용이 과다하여 현재로서는 부담스럽다. 그러나 이 부담이 두려워 지금 온실가스 배출 감축 노력을 꺼린다면 미래 녹색에너지 시대를 선도할 수 없다. 남들이 나서지 않는 감축 노력을 자청하는 까닭은 녹색에너지 기술을 선점해야하기 때문이지 결코 남들이 피하는 부담을 짊어지자는 뜻이 아니다. 눈앞의 비용이 부담스러워 머뭇거리면 코앞에 닥아든 녹색에너지시대에도 낙오자 신세를 면할 수 없다.